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세상의 모든 아침 ...
[NAVER] 임창용 MLB 리포트 <4> 잠시, 김상진을 만나다
     2013.09.10 20:10:09     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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두 달 가까이 마이너리그에 있으면서 예전 생각을 자주 하게 됐습니다. 미국 마이너리그와 한국의 2군 생활이 많이 비슷한 것 같아서 말이죠. 저의 2군 시절이라면 물론 해태에서 뛰었을 때입니다.

진흥고를 졸업하고 1995년 해태에 입단했을 때 전 그리 뛰어난 투수는 아니었습니다. 워낙 쟁쟁한 선배들이 많아서 대부분을 2군에서 보냈죠. 철없고 혈기 왕성한 열아홉 살 청년은 ‘땡땡이’ 참 많이 쳤습니다. 제가 1군 선수가 된 건 이듬해인 96년이었는데요. 7승을 거두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. 저보다 더 기대를 받는 유망주 투수가 있었는데, 진흥고 1년 후배 고(故) 김상진입니다.

아시다시피 상진이는 저보다 훌륭한 재능을 가진 투수였습니다. 96년 데뷔하자마자 9승을 거두며 해태의 선발 한 축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공을 던졌습니다. 기라성 같은 선배들 틈에 상진이가 있다는 건 제게 큰 위안이었죠. 상진이는 저와 달리 참 착실한 성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저와 잘 지냈습니다. 한 살 차이지만 친구와 다름없었죠.


임창용이 마이너리그 트리플 A 아이오아 컵스에서 뛸 때 동료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 (아이안스제공)


날찌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날, 상진이가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크게 부진했습니다. 급하게 제가 구원투수로 나갔는데 못 던지기는 마찬가지였죠. 5회가 되기 전 8점인가, 9점을 줬죠. 우리 둘이서 한 경기를 시원하게 ‘말아먹은’ 겁니다. 예전 해태에선 그런 패배를 도저히 용납하지 않았습니다. 썰렁한 더그아웃 분위기.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습니다.

경기가 끝나기 전 8회쯤? 상진이가 갑자기 이러는 겁니다.

“형, 지금 튀자.”

“야 안 돼. 오늘은 100% 미팅 있을 거란 말이야.”

상진이답지 않게 ‘땡땡이’를 제안한 겁니다. 경기 끝나고 크게 혼날 것 같아서 눈에 띄지 않으면 혼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던 모양입니다. 전 불길한 예감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. 그러더니 잠시 후 또 와서는 “형, 그래도 튀자”고 하는 겁니다. 사실 저도 같은 마음이라 실행에 옮겼습니다.

예감대로, 경기 후 김응용 감독님이 선수단 미팅을 소집했다고 합니다. 저와 상진이를 혼내려다가 둘이 보이지 않으니 “이 XX들, 어디 갔어?”라며 찾으셨다고 하더군요. 코치님들과 선배님들이 화가 난 건 당연했습니다.

다음 날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광주구장으로 출근했습니다. 평소대로 훈련 시작에 딱 맞춰서요. 그런데 착실한 상진이는 30분 전에 야구장에 왔다가 ‘원산폭격’을 하고 있더라고요. 코치님이 “너 일단 창용이 올 때까지 머리 박고 있어”라고 한 모양입니다. 그 다음에는 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 둘 다 무지 혼났죠.

상진이가 있어서 참 재밌었습니다. 야구도 잘했지만 선하고 순한 친구였거든요. 전 98년 삼성으로 트레이드됐고 우리들의 추억은 점점 흐려졌습니다. 상진이는 스무 살에 한국시리즈 완투승도 했습니다. 98년에도 잘 던지다가 위암선고를 받고 투병했습니다. 99년 6월 10일. 너무나 빛나는 나이에 상진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. 저 또한 어릴 때라 그의 죽음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. 같이 까불고 웃던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펑펑 났습니다. 제가 선배였지만 저 또한 어린 나이여서 상진이에게 별로 해준 게 없었습니다. 그게 참 미안했습니다. 해마다 상진이 기일이 되면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.

마이너리그에서 많은 젊은 선수들을 만났습니다. 루키리그에는 17세 고등학생도 있거든요. 그들과 함께 야구하면서 예전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. 어릴 때 임창용 같은 녀석, 예전의 김상진 같은 녀석을 봤죠.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도 여러 선수들을 새로 만났습니다. 상진이가 건강했다면 야구를 참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.


임창용이 7일 밀워키전 첫 등판을 끝내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며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. (포커스케이닷컴)


지난 토요일(한국시간 일요일) 제가 밀워키 전에서 메이저리그 첫 등판을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올 때 하늘을 잠깐 올려봤습니다. 눈썰미 좋으신 기자분이 그걸 보시고 왜 하늘을 봤느냐고 질문 하시더군요. 깜짝 놀라서 “비가 오나 해서요”라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.

사실 첫 등판을 마치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상진이었습니다. 제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선 것을 가족과 친구들도 좋아했겠지만 상진이가 가장 기뻐할 거 같아서요. 승리나 세이브를 땄으면 마음속으로나마 상진이에게 선물했을 텐데, 아무 기록도 얻지 못했으니 그냥 하늘 한 번 올려보고 말았습니다. ‘상진아, 잘 있지?’ 이렇게 짧은 인사만 했습니다.



      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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